왓치맨

1.
많은 감상문을 읽고 왓치맨을 봤다. 영화보러 가는 와중에 우연히 길거리에서 여자친구를 만났다. 여자친구와 왓치맨을 보는건 멍청한 짓이야. 다크나이트를 봤을 때가 떠올랐어. 영화를 본 후 용산 CGV 앞에서 기분이 다크하게 되어버린 여자친구와 길거리에서 싸웠어. 여자친구의 감수성은 다크한 영화를 보면 흡수하는 수준이야.

여자친구와 워낭소리를 봤어.

그래서 왓치맨 코믹스를 다시 일독할 시간적 여유를 얻었어. 왓치맨을 처음 읽은 날 밤에 난 꿈을 꿨어. 나이들고 나선, 일년에 한 두번 꿀까. 꿈하고 인연이 없는데, 그날 잠을 설쳤나봐. 아버지의 늙은 뒷모습이 꿈에서 보였어. 순간 아버지가 돌아보는데 MB더라구. 응? 그래 그 MB. 혐오스럽긴 한데, 내 아버지잖아. 더 말라보이고, 늙어보이고. 아침에 일어나서 찝찝한 기분으로 양치질을 했어. 이게 다 코미디언 때문이야 퉤퉤.

2.
오늘 다시 왓치맨을 보러갔어. 나 혼자.


내가 보기에 잭 스나이더는 장인이야. 스탠리 큐브릭이 떠오르더라. 영화보기 전엔 그랬어. 300처럼 이미지가 과잉되어, 부글거리는 데다가 다크나이트를 섞어 놓았을 줄 알았다구.


영화는 매우매우 철저하게 원작 코믹스를 따라갔어. 극단적인 스타일이 나오는 부분은 잭 스나이더가 300의 감독이기 때문이 아니라, 만화가 그렇게 그려졌으니 그런거야. 놀라웠어.


원작만화를 보면 그 누구냐. 닥터 맨하탄. 그 친구가 팬티를 입었다 벗었다 하잖아?
팬티를 입을 때 마다 팬티 디자인이 바껴. 그걸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지. 단행본을 낼 때 마다 검열 체계가 달랐구나. 그런데, 팬티를 입혔다 벗겼다하는 것도 똑같아. 마치 만화가 스토리보드 같았어. 칸 하나를 읽는 데 들이는 시간도 비슷한 듯 했어.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어. 300을 그렇게 만든 이유가 있었구나. 프랭크 밀러가 그렇게 그렸기 때문에, 그렇게 만든 거였어.


철두철미한 사전 계산과 정밀함과 엄격함이 필요했을거야. 감독이 존경스럽더라. 내가 게임을 기획하잖아. 기획서가 완성단계까지 얼마나 뜯어 고쳐지는지 모를거야. 수많은 사람들의 결과물과 이해가 있으니 한계가 명확하거든. 15초짜리 CF도 콘티대로 만들기는 힘들거야. 종이에 그려진 콘티와 영상은 매체가 현격히 다른 거잖아. 잭 스나이더는 두 매체 사이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정밀하고 넓은 시야와 일을 만들어 나가는 뚝심이 있는 거야. 이 사람은 괜찮은 영화를 앞으로 여러 차례 만들 것 같아.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원작과 다르대. 다른 부분이 있어. 만화를 읽으면서도 개연성 부족으로 답답한 부분이 좀 있어.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원작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냐. 활자매체인데다가, 오랫동안 연재하는 과정에서 설정의 일관성이 부족할 수도 있지 않겠어. 그게 인쇄만화의 특징이기도 하고.


그런데 그게 두시간반으로 압축되면 한 눈에 보여. 말이 안되는 상황이 생긴다고.

하나는 닥터 맨하탄의 인간성이야. 원작에서 닥터 맨하탄은 인간성 자체가 없는 플랫한 공식덩어리일 뿐이야. 이 무미건조한 인간이 방송에서 주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다고 화성으로 피해버려. 애초에 인간에게 별 관심 없었잖아? 갑자기 사춘기 소녀가 된 닥터에게 당황하게 된다고. 영화에서는 가늘고 섬세한 목소리를 심어줘. 순간순간의 떨림도 있어. 좀 더 인간화되어 보였어.

바이트의 해결책도 원작에선 어색했어. 닥터 맨하탄이라는 완벽한 데우스엑스마키나가 있는데, 굳이 닥터를 추방하고 외계인을 투입한다는게 설득력이 없었어. 만화에서는 공포스러운 해적이야기가 병렬로 있으니 분위기만으로 상황을 따라가게 되긴 하지. 이런 어색한 플롯에 개연성을 마련했어.


다른 감독이 했으면, 마치 쌍화점처럼 사람들이 황당해서 웃을 일이 몇번 있었을 거야. 닥터가 갑자기 덜렁덜렁 나오질 않나. 원작을 그대로 따라가면서도 사람들을 벙찌게 하지 않은 것만으로 대단한 거지. 크세르크세르같이 웃긴 녀석도 진지하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이 영화의 감독이 되었구나 그렇게 생각했어.


4.
그리고 냉전시대의 유물도 조금 정리한 것 같아. 레이건노믹스와 MD체계을 신랄하게 비꼬는 영화를 오바마 시대에 틀어주는 건 좀 아니지 않을까. 그런데 그리 낯설지 않았어. 부시 덕분이기도 하고. 정신병자도 조금 줄었어. 실크 스펙터의 엄마도 좀 더 엄마같고, 나이트 아울의 복장 도착도 줄었어. 나이트아울의 과장된 복장을 보여주는 건 재미있었을 텐데.


5.
난 잭 스나이더가 마음에 들었어.

by 분도 | 2009/03/09 00:48 | 책을 읽다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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